오늘은 초등시절부터 줄곧 들어오고 누구나 한번쯤은 들어봤던 화가,
바로 빈센트 반 고흐에 대해 알아보려고 합니다.
물론, 저 또한 빈센트 반 고흐를 사랑합니다.
그의 그림에서 느껴지는 강렬한 에너지와,
고흐만의 붓터치는 정말이지 사랑하지 않을 수 없으니까요.
하지만 반 고흐는 살아생전 가장 불행했던 화가로도 잘 알려져 있습니다.
바로 단 한점의 유화만을 팔았을 뿐이었기 때문인데
그 작품은 바로 1890년에 '아를의 붉은 포도밭'이라는 작품입니다.
그 당시 안나 보흐라는 인물이 400프랑에 구입했는데요,
유화를 제외한 작품은 헤이그 풍경을 담은 스케치 12점을
고흐의 큰아버지인 센트 삼촌의 주문으로
팔기도 하였습니다.
고흐의 어린시절
빈센트 빌럼 반 고흐는 1853년 3월 30일 네덜란드 노르트브라반트주 쥔더르트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 테오도로스 반 고흐(Theodorus van Gogh, 1822~1885)는 네덜란드 개혁교회의 목사였으며,
어머니는 아나 코르넬리아 반 고흐카르벤튀스(Anna Cornelia van Gogh-Carbentus, 1819~1907)였습니다.
빈센트의 어머니는 헤이그의 부유한 가정 출신이었고, 아버지는 목사의 막내 아들이었어요.
빈센트 빌럼이라는 이름은 고흐가 태어나기 1년 전,
사산되어 죽은 형의 이름이기도 했는데
고흐는 형과 똑같은 이름을 가지고 살면서
죽은 형을 대신해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항상 죽음을 생각하고 살았다고 해요.
전혀 그럴 필요가 없었는데 말이죠.
어찌보면 고흐는 굉장히 진지하고 사려깊은 성격이 아니었나 싶어요.
아마도 인프제 INFJ?
빈센트의 부모는 1851년 5월에 결혼했고, 곧이어 쥔더르트로 이사했습니다.
고흐와는 영혼의 형제인 남동생 테오도뤼스 테오는 1857년 5월 1일에 태어났어요.
그만큼 도움도 많이 주었고, 의지도 많이한 동생입니다.
그 외의 형제자매로는 코르넬리스 빈센트 코르,
엘리사벳 휘베르타 리스, 아나 코르넬리아,
빌레미나 야코바 빌이 있습니다.
그러나 빈센트는 오직 빌레미나, 테오도뤼스하고만 연락을 주고받았습니다.
고흐의 주요작품
자, 그럼 우리는 고흐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을까요?
귀를 자른 화가,
자화상을 많이 그린 화가,
생전에 지독하게 가난하게 살았던ㅡ그림을 단 한점 밖에 팔지 못했던 화가,
죽고 나서 오히려 더욱 유명해진 화가,
정신병에 걸려 자살한 화가...
하지만 또한 우리는 그의 유명한 작품들을 너무나도 많이 접하고 있어요.
[해바라기]
《해바라기》는 빈센트 반 고흐가 그린 정물화입니다.
이 그림은 두 가지 버전이 있는데, 첫 번째는 1887년 파리에서 그린 바닥에 놓여있는 해바라기이며,
두 번째는 1년 뒤 아를에서 그린 15개의 해바라기가 꽃힌 그림입니다.
지금 보고 있는 해바라기는 1888년에 그린 두번째 해바라기에요.
해바라기는 고흐의 생애 중 가장 행복했던 프랑스남부 아를(Arles)에서의 생활에서 그려진 작품입니다.
고흐는 친구 고갱(Paul Gauguin)과 함께 살던 작업실을 위해 노란 해바라기를 그렸습니다. 아주 많이요.
그러나 두 사람의 성격 차이와 그림에 대한 관점은 너무 달랐어요.
고흐는 밀레의 영향을 받아 자연을 있는 그대로 그리는 것을 좋아한 반면에
고갱은 기억에 의존해서 창의적으로 그리는 것을 선호했습니다.
이런 두 사람의 관점 차가 극명하게 드러난 것이
아를에서 고흐가 친하게 지낸 카페 여주인 지누의 초상화였는데요.
고흐가 그린 지누의 초상화는 인간 내면의 순간을 포착하려는 의도였던 반면,
고갱은 지누를 마치 남자를 유혹하는 창녀 같은 인상으로 그려냈습니다.
그러나 두 사람의 갈등이 결정적으로 폭발한 그림은 따로 있었어요.
바로 고갱이 그린 "해바라기를 그리는 반 고흐"였습니다.
고흐의 그림에서 인물들은 거의 대부분 뚜렷한 눈동자를 보여주지만,
고갱이 그린 고흐는 흐리멍텅한 모습으로 보여졌습니다.
고흐는 그림에서 눈을 굉장히 중요시 여기는 화가였고,
이러한 생각을 가진 고흐에게 그 그림은 고갱이 자신을 조롱하기 위해서
그린 것이라고 밖에 생각할 수 없었겠죠.
결국 고흐는 술집에서 고갱과 술을 마시다가 술잔을 집어던지는 걸로
자신의 분노를 표출했다고 합니다.
결국 고갱이 온 지 고작 두 달여 만인 1888년 12월 23일,
고흐는 정신병 발작을 일으켰고 면도칼로 자신의 귀를 잘라버리는 자해를 하게 됩니다.
고갱의 회고에 의하면
고흐가 면도칼을 들고 자신을 노려보며 나타나서
자신을 찌를 듯해 보였지만 그러지 않았고, 그 뒤에 귀를 잘라버린 걸로 보이며,
잘라낸 귀를 가끔 만나던 사이인 라셸이라는 창녀에게 건네주었습니다.
그걸 보고 기겁한 라셸이 경찰에 신고했다고 하는 기록이 남아있습니다.
[자화상]
반 고흐는 여러 개의 자화상을 그렸으며, 이는 그의 내면 세계와 감정을 드러내는 중요한 작품입니다.
[ 밤의 카페 테라스(Café Terrace at Night) ]
밤의 카페 테라스(Café Terrace at Night)는 1888년 9월 중순에 프랑스 아를에서 그림을 그렸습니다.
아를의 포룸 광장(Place du Forum)의 북동쪽에 그가 그린 그림의 배경이 된 카페에 방문할 수 있으며,
이 카페는 반 고흐의 그림 재현을 위하여 1990년~1991년 재단장되어 현재 관광지가 되었습니다.
[ 아를의 방 ]
이 그림은 프랑스 부슈 뒤 론 주 아를의 라마르틴 광장(Place Lamartine) 2번지에 위치한,
고흐의 그림 《노란 집》으로도 알려진 반 고흐가 살던 집의 침실을 묘사했다고 합니다.
오른쪽 문은 위층과 계단으로 연결되어 있으며
왼쪽 문은 그가 폴 고갱을 위해 준비한 객실의 문입니다.
정면 벽의 녹색 틀의 창문은 라마르틴 광장과 공공 정원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이 방은 직사각형이 아니라 정면 벽의 왼쪽 모서리에 둔각이 있고
오른쪽에 예각이 있는 사다리꼴을 띠고 있습니다.
[ 별이 빛나는 밤 ]
〈별이 빛나는 밤〉(영어: The Starry Night)은 빈센트 반 고흐의 가장 널리 알려진 작품이자
정신병을 앓고 있을 당시 고흐가 그린 그림입니다.
1889년 생레미의 정신병원에서 고흐는 정신적 질환으로 인한 고통을 떠올려
그림 속의 소용돌이가 무너졌습니다.
연속적이고 동적인 터치로 그려진 하늘은 굽이치는 두꺼운 붓놀림으로 사이프러스와 연결되고,
그 아래의 마을은 대조적으로 고요하고 평온한 상태를 보여준 작품입니다.
교회 첨탑은 그의 고향인 네덜란드를 연상시키는 이미지입니다.
[가셰 박사의 초상]
《가셰 박사의 초상》(Portret van Dr. Gachet), 혹은 《의사 가셰의 초상》은 고흐가 그린 유화 그림입니다.
이 그림은 두 가지 판이 있는데,
두 작품 모두 반 고흐 생애의 마지막 달인 1890년 6월에 완성되었으며
고흐의 주치의였던 폴 가셰 박사의 초상화입니다.
두 그림 모두 폴 가셰 박사가 오른쪽 팔에 머리를 괴고 몸을 기울여 탁자에 앉아 있습니다.
그림 속의 가셰 박사는 디기탈리스(digitalis)를 들고 있는데요.
박사는 죽기 전의 고흐를 잘 돌봤으며, 그림 그리기가 취미여서 고흐에게 좋은 친구가 되었다고 해요.
고흐는 동생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 그림에 대해 이렇게 썼다고 해요.
가셰 박사 초상을 우울한 모습으로 보이게 마쳤어.
누가 보면 인상 쓰고 있다고 느껴질 정도야…
슬프지만 점잖고, 아직 명석하고 지적이게.
얼마나 많은 초상화가 이렇게 되어야 했었나…
거기엔 현대의 정점이 있어.
오랫동안 지켜봐 왔던,
아마도 백년 후에도 고대하며 돌아보게 될.
반 고흐 그림들은 세상에서 가장 비싼 그림들입니다.
1990년 5월 15일에 그의 《가셰 박사의 초상》(첫 번째 판)이
크리스티즈에서 8,250만 달러(한국돈으로 약 580억원)에
일본의 다이쇼와 제지 명예회장 사이토 료에이(당시 74세)에게 팔림에 따라,
새로운 최고가 기록을 세웠습니다.
당시 사이토가 지불한 8,250만 달러는 낙찰가 7,500만달러에 경매가 구전 10%가 가산된 금액이며,
이후 《가셰 박사의 초상》은 미국의 수집가에게 4,400만 달러에 다시 팔렸습니다.
고흐의 화풍
초기 고흐에게 영감을 준 화가들은 렘브란트나 프란스 할스 같은 네덜란드의 옛 거장들이었어요.
그들에게서 고흐는 거친 붓 스타일과 음영이 뚜렷한 기법 같은 것을 배웠습니다.
그러나 고흐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준 화가는 밀레였습니다.
고흐의 밀레에 대한 존경은 대단해서 "밀레 사부"라고 부를 정도였고 밀레의 그림을 모사하기도 했습니다.
물론 밀레의 스타일을 고흐가 그대로 수용한 것은 아니며
오히려 밀레는 고흐에게 고흐 그림의 중요한 소재인 자연,
그리고 자연 속의 평범한 사람들을 그리는 것에 더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고흐는 파리에 와서야 인상주의를 제대로 알게 되었고 비록 인상주의 스타일에 유보적이긴 했으나
그 영향을 받아들였습니다.
파리 이후로 고흐는 인상주의의 주요한 특징 중 하나인 색채의 활용에 능해졌고
쇠라와 들라크루아의 영향을 받았는데요.
쇠라에게는 점묘법의 영향을 받아 붓터치가 점 모양을 띄는 양상으로 나아갔고
들라크루아에게서는 대담한 색채의 활용이라는 영향을 받았습니다.
또한 일본의 우키요에에게서도 영향을 받아 그림자의 생략,
가는 선으로 둘러싸여진 얕은 채색, 풍경과 대비되는 거의 보이지 않는 크기의 인물 등의
일본적 스타일을 받아들이기도 했습니다.
고흐는 종종 두꺼운 붓질을 사용하여 페인트를 캔버스에 직접적으로 쌓아 올렸습니다.
임파스토 기법은 작품에 물리적인 질감을 부여하고,
빛이 반사되는 방식에 따라 색이 다르게 보이게 합니다.
이는 그의 작품에 생동감을 더하는 요소로 작용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특정 색이 특정 감정을 상징한다고 믿었습니다.
노란색은 행복과 따뜻함을, 파란색은 슬픔과 고독을 나타내는 등
색의 상징성을 통해 감정을 전달했습니다.
아를(Arles) 시기에 이르러 고흐의 화풍은 완성단계에 이르게 됩니다.
화려한 색채와 독특한 선 터치 등을 사용했는데
특히 아를 이후의 그림에서 눈에 띄는 것이 다양한 형태의 선이 바로 그것입니다.
생레미 시절에 특히 두드러지는 이런 선들은 나선, 원, 물결 등의 모양으로
형상을 구성하는 방식을 취했는데 "별이 빛나는 밤"이 이런 독특한 선으로 구성된 대표적 작품입니다.
고흐, 별이 되다
1890년 7월 27일, 오베르쉬르우아즈의 밀밭에서 자신에게 총을 쏜 고흐는,
이틀 후 라부 여인숙에서 동생 테오 곁에서 숨을 거두었습니다.
고흐는 결국 쇠약해진 몸과 정신을 이겨내지 못하고 스스로 가슴에 총탄을 쏘았지만
총알이 가슴을 관통해 척추에 걸려 손상을 입은 채 피투성이로
1.6km에 달하던 Auberge Ravoux 여관으로 와서 쓰러졌는데,
다락방 침대 위에 피를 흘리고 누워 있는 그를 라부의 가족이 발견합니다.
여관 사람들이 가셰 박사와 마제리 박사, 두 의사를 데려왔고,
다음 날 아침 테오가 고흐를 찾아왔으며,
고흐는 자신의 방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고 합니다.
당시 고흐는 의식도 있었고 스스로 담배를 피울 정도로 상태가 좋았지만
곧 총알에 의한 감염으로 그날 밤 의식을 잃고
이틀 만인 1890년 7월 29일에 숨을 거두었습니다.
동생 테오는 형의 사후 한 달 뒤인 1890년 8월 자신의 파리 아파트에
고흐의 그림 350점을 전시하는 회고전을 열었습니다.
그러나 테오도 고흐가 죽은 후 6개월 만에 세상을 떠납니다.
사후 15년인 1905년,
스데델리크 뮤지엄에서 무려 484점의 작품을 전시한 대규모 회고전이 열렸습니다.
유럽 전역에서 평론가들이 찾아왔고 고흐는 거장의 반열에 올랐으며,
이 회고전 다음에 작품 가격이 2, 3배 올랐다고 합니다.
그리고, 1930년대부터 빈센트 반 고흐는 전세계적 인기를 가진 대중적인 화가가 되었습니다.
조카 빈센트 반 고흐 주니어는 물려받은 그림을 네덜란드 정부에 기증하여
1973년 '반 고흐 미술관'을 세웠으며, 이 곳은 현재 네덜란드의 대표 관광 명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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