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우리가 가장 잘 알고 있는 화가, 그 이름도 유명한 피카소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파블로 피카소(Pablo Picasso)는 1881년 10월 25일 스페인 말라가에서 태어나 1973년 4월 8일 프랑스 무젱에서 사망한 스페인의 대표적인 화가이자 조각가입니다. 화가, 작가, 예술가, 조각가로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였으며, 20세기를 대표하는 미술가 중 하나로 현대 미술의 거장으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조각, 도자기, 드로잉 등 다양한 매체에서 활동하며, 20세기 미술사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 중 하나로, 다양한 스타일과 혁신적인 기법으로 현대 미술계에 큰 획을 그었습니다.
피카소의 생애
피카소는 풀네임이 특히 깁니다.
'파블로 디에고 호세 프란시스코 데 파울라 후안 네포무세노 마리아 데 로스 레메디오스 시프리아노 데 라 산티시마 트리니다드 루이스 이 피카소'. (Pablo Diego José Francisco de Paula Juan Nepomuceno María de los Remedios Cipriano de la Santísima Trinidad Ruiz y Picasso)
뭐가 생각나네...김수한무거북이와두루미삼천갑자동방삭...ㅋㅋㅋ 그쵸? 급할 땐 숨 넘어 가겠어요.
왜 이렇게 길어졌냐하면... 이베리아 반도 문화의 특징 때문인데요.
결혼 후 자식이 양 부모의 성을 합치게 되는데, 조상들의 성을 다 붙이고 정리를 하지 않다보니 이름이 길어지게 되었다고 해요. 이 긴 이름을 부모만의 성으로 짧게 줄이면 파블로 루이스 피카소(Pablo Ruiz Picasso)가 되며, Ruiz가 본래의 성씨라고 합니다. 피카소는 그의 어머니의 성씨였고, 본래 '파블로 루이스'로 불리는 것이 맞으나 그가 19살 때 피카소를 선택하면서 파블로 피카소로 알려졌습니다.
"네가 내 꿈을 이루어 다오."
피카소가 태어날 무렵 그의 아버지 호세는 식당 장식을 하는 화가였습니다. 아버지의 영향으로 피카소는 말도 배우기 전부터 그림을 배우게 되는데, 그 천재적인 소질로 아버지를 항상 놀라게 했다고 합니다.
말보다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게 먼저, 처음 입 밖으로 내뱉은 단어가 연필이었다고 할만큼 그림에 재능이 있었으며, 화가 지망생이었던 아버지 호세 루이스(호세 루이스 이 블라스코, 1838~1913)의 조수 노릇을 했는데, 피카소의 그림 실력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가 아래의 토르소 소묘가 바로 그 그림입니다.
**토르소 - 이탈리아어로 '몸통'이라는 뜻에서 유래되었으며, 고대 그리스나 로마의 유적지에서 발굴해 낸 조각상 중 몸통만 남은 것들에서 독자적인 아름다움을 발견한 근대의 조각가들이 본따 만들어낸 일련의 조각들에서 시작.
그가 10살 즈음에 그렸던 이 그림은 요즘의 초등 5학년 나이에 그린 그림인데요.
어떠세요. 그림을 모르는 일반인들이 보아도 이상한 점을 못 느낄 만큼 완벽하게 표현이 되었죠. 피카소는 스스로도 그림을 잘 그린다는 자각이 있었던 듯해요. 한 일화로 아버지 호세의 조수 노릇을 했는데, 호세는 피카소가 자신이 시킨 그림의 마무리 (새 다리 그려넣기)을 해온 것을 보고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네가 내 꿈을 이루어 다오."
그의 아버지인 호세 루이스 블라스코는 예술학교의 교수였으며, 피카소에게 미술을 가르치며 피카소에게 거는 기대도 많았을 겁니다. 모든 부모들이 그렇듯이요. 피카소는 바르셀로나 미술학교와 마드리드의 왕립 미술 아카데미에서 교육을 받았습니다.
청색 시대 (1901-1904):
1900년, 피카소는 파리로 이주하여 몽마르트르 지역에서 활동했습니다. 파리에서 그는 다양한 예술가들과 교류하며 자신의 스타일을 발전시켰습니다. 1901년의 어느 날, 파리에 머물면서 한창 작업중이던 피카소는 갑자기 일생일대의 위기를 겪게 되는데 바로 절친했던 친구 카사헤마스의 자살이었습니다. 가난한 형편임에도 불구하고 하루하루 그림을 그리며 버텨나가고 있던 중, 가장 가까웠던 친구의 죽음은 피카소에게 큰 충격이 되었고, 그 이후부터 피카소의 그림에는 커다란 변화가 닥쳐옵니다. 바로 1901년부터 3년간 이어진 피카소의 '청색 시대'입니다.
친구의 죽음때문에, <청색시대>동안 피카소의 그림은 주로 가난한 사람들이 처한 여렵고 고된 상황을 주로 그림으로써 슬픔의 그림자를 짙게 드리우고 있다는 점이 특징인데요. 우울한 색상으로 여겨지는 어두운 청색을 주조색으로 사용하여(가난한 형편 때문에 청색조의 물감을 주로 쓸 수밖에 없었기 떄문이라 추측하기도 한다) 한층 더 암울한 분위기를 강조하였습니다.
청색시대의 대표적인 작품들을 한번 감상해 보실게요.
1901년작인 "카사헤마스의 죽음"은 청년시절 친구이자 동료 화가였지만 실연 때문에 자살하여 20세로 요절한 카를로스 카사헤마스(Carlos Casagemas)를 추모하기 위해 그렸습니다.
장미 시대 (1904-1906):
청색 시대 이후, 피카소는 주로 분홍색과 오렌지색 계열의 밝은 색조를 사용하기 시작했습니다.
왜 장미시대라고 명했을까요. 네 맞아요. 20대의 피카소에게 사랑이 찾아왔기 때문이에요. 장밋빛 시대 The Rose Period, 그는 춥고 배고프던 파리의 푸른 겨울, 어둠침침하고 우울한 푸른 빛을 캔버스에서 걷어내기 시작했습니다.
장미 시대는 여인과의 사랑으로 한층 밝아진 분위기가 나타나는 시기로, 초기인 ‘청색시대’를 거친 후 전개되었습니다.
이 시기의 작품들은 피카소가 파리에 머물 때 그려졌지만, 오늘날 그의 초기 작품들과는 달리 스페인 화풍이 아니라 프랑스 화풍에 가까운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고 합니다. 이 2년의 기간 동안 피카소는 전과는 달리 붉은색과 분홍색을 많이 사용했습니다.
이러한 변화가 일어난 것은 그가 많은 그림들의 주제로 삼았던 페르낭드 올리비에와의 로맨스 때문이라는 의견이 지배적이에요. 즉, 이 시기는 파리에 완전히 정착하고 첫 번째 애인인 올리비에와의 만남이 이루어지면서 초기의 사회적 비관주의와 좌절감에서 벗어나 서정적이고 개인적인 향수를 담아내고 있습니다. 이 시기부터 그는 세련된 장밋빛과 갈색톤으 로 어릿광대와 곡예사 같은 서커스 광대를 즐겨 그렸습니다. 장미 시대 혹은, 서커스 시대의 그림들은 감상적이고 로맨틱한 주제로 채워지고 있었죠.
이 시기에는 서커스와 곡예사 등 서정적인 주제가 많이 등장했습니다. 사랑에 빠진 자신의 모습이 광대처럼 느껴져서 일까요. 대표작으로는 "곡예사가족"이 있습니다.
빨간색 옷을 입은 광대는 피카소와 절친했던 서커스단의 단원이었던 친구인 티오 페페로이며, 시간이 날 때마다 서커스단을 찾았던 피카소는 자신이 처한 어려운 예술가로서의 삶이 마치 어릿광대와 곡예사가 보여 주는 각박한 현실의 모습과 유사하다고 느꼈습니다. 오른쪽 홀로 앉아 있는 여인은 곡예사들과는 어울리지 않는 고독한 모습으로 자리잡고 있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아한 미의 여신과 같은 분위기의 이 젊은 여인은 피카소의 연인이었던 올리비에의 모습이라 합니다.
그림은 사막과 같은 황량한 느낌의 벌판에 자리 잡고 있는 가족들의 모습은 서로 말없이 양쪽으로 나뉘어졌는데, 각자 다른 시선 속 피카소는 화면에서 정지된 듯한 그들의 모습에서 소외되고 고통받는 예술가로서 자신의 현실과 동일시하고자 하였습니다.
입체파 (큐비즘) (1907-1917):
피카소는 조르주 브라크와 함께 입체파를 창시하였습니다. 입체파는 사물을 여러 시점에서 동시에 보는 방식으로 해체하고 재구성하는 기법입니다.
입체주의(입체파)란 "대상을 기하학적인 형태로 해석하여, 평면상의 캔버스에 재구성하려는 경향" 으로 정의됩니다.
쉽게 말씀을 드리면,
우리가 살아가는 공간은 3차원의 세상이고 입체적인 대상들로 구성되어 있죠.
반면 캔버스 속 공간은 2차원으로, 점과 선으로만 구성되어 있습니다.
입체주의(입체파)는 3차원의 대상을 2차원으로 표현하지 않고, 3차원의 느낌을 최대한 살려 표현하고자 했습니다.
입체주의 화가들은 2차원 평면에 입체를 구성하고자 했던 시도를 한 사람들이죠.
입체파의 다른 이름은 큐비즘(cubism)으로, 정육면체의 영문 이름 큐브(cube)에서 비롯됩니다.
입체파가 3D를 표현하려고 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충분히 이해가 되는 이름이죠.
정육면체는 평면이 아닌 입체의 대상이니까요.
다른 입체파 화가로는 조르주 브라크, 마르셀 뒤샹, 페르낭 레제 등이 있습니다.
특히 조르주 브라크는 피카소화 나란히 초기 입체주의를 고안하고 발전시킨 인물이기도 합니다.
입체파의 아이디어는 폴 세잔(Paul Cézanne)으로부터 출발합니다.
세잔은 자연의 모든 형태를 원기둥, 구, 원뿔로 해석하였다고 합니다.
그로 인한 독특한 화풍, 붓터치 등으로 세잔의 그림에서는 원근감과 입체감이 두드러졌다고 합니다.
이런 점에서 폴 세잔은 야수파와 입체파에게 아이디어를 제공하였고, '근대회화의 아버지'라 불리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폴 세잔 이후 미술계는 더 이상 이미지를 사실적으로 그리는 것을 추구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미술계는 처음부터 끝까지 똑같지 않고, 항상 변화해왔죠. 사람 비슷한 게 나오다가 별안간 도형과 선으로 이루어진 그림이 나오고, 피카소의 그림들 또한 "어떻게 하면 평면에서 입체의 여러 면(특성)을 한 번에 나타낼 것인가"라는 개념을 표현한 것이라는 것을 이해하고 바라본다면 좀 더 이해가 쉬울까요.
피카소의 입체파(큐비즘) 그림은 아름다워서 훌륭한 것이 아니라 기존의 극사실주의 중심의 미술사조를 벗어나 새로운 개념과 장르를 개척했다는 것에 의의가 있으며, 또한 구성의 미도 있다고 볼 수 있어요.
이 때의 대표작으로 "아비뇽의 처녀들"이 있습니다.
아비뇽의 매춘부들은 손님을 기다리면서 치장을 하고 있으며 서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피카소는 이들이 존재하는 방식을 인문적인 의미의 차원에서가 아니라 기하학적인 구조의 차원에서 파악했는데 세잔이 시도한 공간의 복수화가 더 철저하게 이루어졌으며, 마치 다양한 관점들이 복잡하게 교차하듯이 화면이 구성되었어요.
보색의 사용도 뛰어나 화면 오른쪽의 파란색은 화면 전체에 질서를 가져다주며 단조로움을 탈피하게 하고 있습니다. 또 하나 빼놓을 수 없는 특징은 인물들의 얼굴인데요. 그 얼굴들은 마치 피카소에게 강한 영향을 끼친 아프리카·오세아니아 등에서 건너온 ‘미개인들의 예술’을 연상시킵니다. 특히 오른쪽 위의 매춘부 얼굴은 마치 아프리카의 가면을 쓴 것과도 같은데 이 작품은 초기 시대의 관심사, 새로운 미학적 실험, 그리고 탈서구적 영향이 골고루 배어 있는 대표적 작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로 아비뇽의 처녀들이 원시시대의 대표작이며
피카소가 입체주의 화가로 발돋움 할 수 있는 발판이 되어준 작품이죠.
고전주의와 초현실주의 (1917-1937):
이 시기 피카소는 고전주의적인 요소를 도입한 작품을 많이 제작했습니다.
1920년대에 와서 피카소는 입체주의를 벗어나 고전적인 요소들의 그림을 그리게 됩니다.이 시기가 고전주의 시대로 불리게 되는데요. 이탈리아 여행을 하며 신화적이며 고전적인 소재들에 대해 영감을 받으면서 피카소만의 재해석을 하게 되죠.
하지만 피카소의'고전주의 시대'도 곧 막을 내리게 됩니다.
입체주의를 버렸다고 비난을 받던 피카소는 다시 큐비즘 작품을 선보입니다
1920년대 초 '신고전주의 시대'의 풍만한 육체 묘사와 병행하여, 큐비즘을 탐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목기 위의 정물을 매우 정밀하게 묘사하고 있으면서도 그 배경은 흐리게 그립니다. 피카소의 인물화에 있어서 얼굴은 정밀하게 묘사하면서도 다른 부분에 대충 끝맺는 것과 같은 기법인데요. 다 그리면 오히려 포인트를 잃어버려, 사물의 리얼리티를 위하여 배경을 단순한 분위기로 만들어 버리는 것입니다.
또한 초현실주의 대표작으로는 "세 명의 음악가"가 있습니다.
입체파의 거장 피카소의 1920년대 주요작품은 콜라주를 이용한 이미지의 재현이었습니다. 이 작품은 직접 캔버스에 오브제를 붙이는 콜라주 기법에서 벗어나 면과 선을 통해 붙인 것처럼 그린 작품인데요.
단순화된 인물 표현과 색의 조화가 두드러집니다. 현재 뉴욕 현대미술관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게르니카 (1937):
피카소의 가장 유명한 작품 중 하나인 "게르니카"는 스페인 내전 중 독일 공군이 스페인의 작은 마을 게르니카를 폭격한 사건을 주제로 한 대형 벽화입니다. 이 작품은 전쟁의 참혹함과 고통을 강렬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 작품은 비극적이며 힘이 넘치는 대표작이 되었습니다. 1937년 4월 26일, 스페인 내전 당시 독재자인 프랑코 총통은 나치 공군의 콘도르 군단을 동원하여 마을에 주둔한 공화국군의 퇴로를 차단할 목적으로 바스크지방의 작은도시 게르니카를 폭격하였습니다. 그들은 무려 3시간 동안이나 폭탄을 퍼부어 2천 명이 넘는 시민을 학살하고 수천명의 부상자를 만들어 마을을 쑥대밭으로 만들었어요.
피카소는 고국의 이런 참담한 소식을 듣고 분노하여 폭7.6m 높이 3.5m 의 이 벽화를 혼자 한달만에 완성하였다고 합니다. 어마어마한 크기의 이 작품을 피카소는 붓이 아니라 롤러로 그림을 그렸어요. 이 작품은 전쟁의 비참함을 다룬 작품 중 가장 힘에 넘친 걸작으로 평가되며, 이때 피카소 나이 56세였습니다. 산산이 부서지고, 공포의 혼란함을 잘 나타내고 있는 목이 베인 군인, 죽은 아이를 품은 어머니의 절규, 부러진 칼을 꼭 쥐고 있는 잘린팔 등, 화면 전체가 비극적인 요소가 가득합니다.
황소는 파시즘의 상징은 아니나 잔인함과 어둠을 의미 한다.
말은 민중을 상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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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블로 피카소, 게르니카
한국에서의 학살
또한 1951년 6.25 전쟁을 모티브로 한 <한국에서의 학살>이라는 그림도 그렸습니다. 그 당시 가장 유명한 화가의 한국을 모티브로 한 그림이라니, 새삼 한국전쟁이 얼마나 이슈였는지 뒤돌아보게 해줍니다.
흔히 노근리 양민 학살 사건 혹은 신천 양민 학살을 주제로 했다고 하나 확실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전쟁의 참상을 고발하기 위해 그린, <게르니카>와 함께 그의 대표적인 반전 작품 중 하나로, 당시 '미군을 학살자로 묘사했다'는 주장도 생기는 바람에 한국에선 1980년대까지 금지 예술품이기도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잘 모르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브루스 커밍스의 저서 《한국전쟁의 기원》은 그 표지에 이 그림을 쓰고 있는데요. 이 때 피카소는 프란시스코 데 고야의 <마드리드, 1808년 5월 3일>, 에두아르 마네의 <막시밀리안의 처형>의 구도를 참고해서 그렸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피카소의 그림 스타일
피카소는 한 가지 스타일에만 머무르지 않고, 다양한 스타일을 실험하였습니다. 그의 작품은 청색 시대, 장미 시대, 입체파, 고전주의, 초현실주의 등 여러 시기로 나뉩니다.
피카소의 입체파(큐비즘) 작품은 사물을 여러 시점에서 동시에 보는 방식으로 해체하고 재구성하는 기법을 특징으로 합니다. 이는 전통적인 원근법과는 다른 혁신적인 접근 방식이었습니다.
또한 그는 작품에서 색채를 매우 중요하게 사용했는데요. 청색 시대의 어두운 파란색, 장미 시대의 따뜻한 분홍색과 오렌지색 등 각 시대마다 특정 색조를 사용하여 감정을 표현했습니다.
피카소는 형태를 단순화하고 해체하는 기법을 사용하여, 사물의 본질을 탐구하고자 했습니다. 이는 특히 입체파 작품에서 두드러집니다. 피카소는 그의 작품에서 사회적, 정치적 주제를 다루기도 했습니다. "게르니카"는 전쟁의 참혹함을 고발하는 대표적인 작품입니다.
말년까지 회화, 판화, 도자기 등 가리지 않고 왕성한 작품 활동을 해오던 피카소는 1973년 프랑스 남부에서 92세의 나이로생을 마감했습니다. 그는 90세가 넘는 삶을 살 때까지 정말 엄청난 양의 작품들을 남겼어요.
피카소의 미술사조는 정의 내릴 수 없을 만큼 많은 변화가 있었죠. 그중 피카소의 가장 유명하고 미술사 역사에 큰 획은 그린 그림들은 어린아이처럼 그린 추상화였습니다.
그가 평생 부러워했던 것이 그 또래 어린아이들의 천진난만했던 화풍이었습니다. 그는 타고난 재능이 지나친 나머지 미술적인 감성면에서는 붓을 잡자마자 유아기도 사춘기도 없이 곧바로 성인이 되어버렸기 때문에, 일부러 서툴게 그리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었던 것이죠. 그래서 그는 평생을 끊임없이 어린아이들의 화풍을 연구하고 그려왔어요.
여담으로 유명한 일화가 있어요.
아름다운 한 여인이 파리의 카페에 앉아 있는 파블로 피카소에게 다가와
자신을 그려 달라고 부탁했으며, 적절한 대가를 치르겠다고 말했다.
피카소는 몇분 만에 여인의 모습을 스케치해 준 다음
50만 프랑(약 8,000만 원)을 요구하자 여자가 놀라서 항의했다.
"아니, 선생님은 그림을 그리는 데 불과 몇 분밖에 걸리지 않았잖아요?"
피카소가 대답했다.
"천만에요. 나는 당신을 이렇게 그리는 실력을 얻기까지 40년의 시간이 걸렸습니다."
훗날 그려진 입체파 그림들에 대해서 대중의 반응은 이해하기 힘들다는 평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요즘의 현대미술에 비하면 피카소의 입체파 그림은 오히려 상당히 이해하기 쉬운 편이기도 합니다. 현대미술의 괴리를 경험하고 난 사람들은 그제서야 피카소의 천재적인 재능을 다시 돌아본다는 말까지 할 정도이까요.
게다가 위에 나오듯이 이미 입체파 그림을 그리기 전부터 피카소의 실력 자체는 정점에 이른 수준이었습니다. 그래서 피카소의 이 실력은 입체파 그림을 비롯한 현대미술을 오해하거나 오용하는 자들을 비판할 때 인용되기도 한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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